15세기 말 16세기 초의 官人 宋碩忠(1454-1524)의 年譜, 遺詩, 文字 등을 수집한 遺 事이다. 본서의 黃龍漢이 쓴 序文(1812년:순조2)과 宋應望이 쓴 跋文(1813년)에 의하 면, 宋碩忠의 遺文 등이 士禍로 인하여 거의 유실되었는데, 그의 후손인 宋弘濟가 남 은 文字를 정리하고 또 契會圖 등 다른 자료들을 수집하여 1812년(순조12) 1책으로 완 성하고 후일 1813년 간행하였다 한다. 年譜 및 行狀에 의하면, 宋碩忠의 本貫은 陜川, 字는 元老, 號는 訥齋이며, 通訓大夫 永柔縣令 宋綸의 아들이다. 1478년(성종9)에 진 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과거를 준비하는 한편 金宏弼, 崔溥, 朴聃孫, 申 希演 등의 유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쌓았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 교유하던 인물들이 화를 입게되자, 평소 이들과 왕래하던 서간을 강물에 던지 고 병을 빙자하여 鄕里에 내려가 서사에 몰두하였다 한다. 遺事의 순서와 내용은 다음 과 같다. 먼저 金굉(土+宏)과 黃龍漢이 쓴 유사 序文(1812년:순조2)이 있다. 다음 유 사의 目錄과 宋碩忠의 世系로 4대 선조를 기술하고, 訥翁先生子孫錄이 附記되어 있다. 이후 家傳되는 자료 약간을 토대로 작성한 일종의 年譜 형식으로 宋碩忠 事實이 있다. 한편 遺文으로 詩(輓韓毅庵伯倫)와 몇편의 書簡文, 護軍 河哲石에 보내는 편지, 姜景 敍에 보내는 답장 등이 있다. 다음은 試券으로, 道를 어떻게 펼치는가(道之所敍)에 대 한 答으로 道의 나오는 곳(道之所出)을 서술한 내용이다. 情志交孚契會圖는 宋碩忠과 함께 계회에 참가한 인원의 명단(生員 金宏弼, 宋碩忠 등 10인)과 간단한 契會影幀이 있다. 다음 1568년(선조1)에 晉州牧使 朴承任이 쓴 宋碩忠의 墓碣銘과 從侄 宋希奎가 撰한 송석충의 遺事와 鄭宗魯가 찬한 行狀, 그리고 여러 史籍에서 宋碩忠 관계 사실을 초록한 敍述이 있다. 한편 이후 金應祖의 契會圖識 및 裵應聚 송석충의 影幀을 보고 쓴 後識가 있다. 그리고 禹錫鼎 및 李子敬의 贈別詩(送宋元老之京師) 3首와 李秀亨(이수형) 이 쓴 宋碩忠의 輓祠 및 祭文이 있다. 마지막으로 書院 奉安 관련 문서 몇편(牧溪別祠奉 安文, 常享祝文, 山泉書院陞號時告由文, 還安文)과 宋碩忠의 師友錄이 있는데, 기록 인물은 金宗直, 權七臨, 韓伯倫, 李秀亨(이수형), 金宏弼, 鄭汝昌, 南孝溫, 崔溥, 朴聃孫, 申 希演, 李 , 金馹孫, 姜景敍, 異穆, 李 , 李堂鼈, 文敬仝, 鄭應祥, 孔仁達, 郭承華, 琴 致湛, 禹錫鼎, 李子敬, 權五紀, 權五福, 太斗南, 宋希奎, 李仁堅 등 30인으로 字. 號 와 함께 간단한 行蹟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宋碩忠의 遺墨과 宋應望이 쓴 유사 의 跋文(1813년)이 있다. 본 遺事 가운데 특히 師友錄은 무오사화와 관련한 인물 연구 와 16세기 士禍 시기에 儒者의 대응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다. (김 호)